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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동지신묘록

광일거사 2014. 3. 15. 20:27

禪을 무술이나 스포츠에 접목시키는 것이야 말로 걸림 없는 무주를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만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 아닌, 상대와의 교류를 통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보았는데, 부동지신묘록의 글이 가장 실전적인 것 같더군요.

밑의 글이 전문(全文)인지는 모르겠으나 따로 출판된 책도 없는 것 같고 인터넷 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부동지신묘록 원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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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은 일본무도, 특히 검도에서 《오륜서(五輪書)》와 함께 병법(兵法)의
극의를 서술한 고전으로 유명하다. 옛날부터 검선일여(劍禪一如)라는 말이 있는데,
오륜서가 검(劍)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라면, 탁암은 선(禪)의 입장에서 각각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검의 기술 수련을 통해 승부나 생사의 문제를 논하는 오륜서와 禪의 내면적 의미로부터 그것을 논하는
'부동지신묘록'과의 사이에 관련성 여부에 흥미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탁암선사의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을 소개한다.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

무명(無明)이란 글자 그대로 ‘밝지 않은 것’이다. 지혜롭지 못해 헤매는 것이다.
주지(住地)란 ‘멈춘 경지’이다. 불법 수행의 단계에 52경지란 것이 있다.
주(住)란 ‘머문다’는 의미이다. ‘머문다’는 것은 무엇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병법(兵法)에 비유하자면 상대편으로부터 닥쳐오는 태도(太刀)를 한번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 태도(太刀)를 막으려고 한다면, 상대의 태도(太刀)에 마음이 머물어 이쪽의 움직임이 둔해져
상대에게 베임을 당하게 된다. 이것을 ‘마음이 머문다’고 한다.

쳐오는 태도(太刀)를 보아도 거기에 마음을 멈추지 않고 상대가 쳐오는 태도(太刀)의 리듬에 맞추어
이 쪽에서 쳐야겠다고 생각지도 말며, 사안(思案)과 분별을 그치고 치려고 든 태도(太刀)를 보이거나 말거나
거기에 조금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붙어 들어가며 상대의 태도(太刀)를 막으면,
베어오는 태도(太刀)를 이쪽이 빼앗아 거꾸로 상대를 벨 수가 있는 것이다.

선종(禪宗)에서는 이것을 ‘오히려 쟁머리를 잡아 거꾸로 적을 찌르는 것’이라 말한다.
쟁(錚)은 창이다. 상대의 검을 이쪽에서 빼앗아 거꾸로 상대를 벤다는 뜻이다.
당신이 말하는 무도류(無刀流)의 무도가 바로 이것이다. 상대가 쳐오거나 내가 쳐나가거나,
치는 사람이나 치는 태도(太刀), 틈이나 박자에 마음을 조금이라도 빼앗기면 이쪽의 움직임이 둔해져
상대에게 베임을 당할 것이다.

적 앞에서 내 몸을 의식한다면 적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기 때문에 내 몸에라도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
내 몸에 마음을 붙잡아 두는 것은 입문해서 비로소 수련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내 몸을 붙잡아두려고 하면 나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박자를 맞추려고 마음을 두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자기 태도(太刀)에 마음을 두면 그 태도(太刀)에 마음을 빼앗긴다. 요약하자면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쪽이 겉껍질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불법에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다. 불법(佛法)에서는 이렇게 머무는 마음을 ‘미(迷)’라 하고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라 한다.




제불부동지(諸佛不動智)

제불부동지(諸佛不動智)란 말이 있다. 부동(不動)이란 글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지(智)는 지혜의 지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목석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에 마음은 자유롭게 움직이나 어떤 일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부동지이다.

부동명왕은 오른손에 검을 들고, 왼손에 밧줄을 쥐었으며 이를 허옇게 드러내고 눈을 부릅떠
불법을 방해하는 악마를 퇴치하려고 버티고 서 있다. 이 같은 모습은 어떤 나라에서도
불법 수호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부동지(不動智)를 체현(體現)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비추어지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은 겁을 내어 불법과 원수를 맺지 않으려 하며,
깨달음에 가까이 간 사람은 부동지의 표현을 알고 일체의 헤메임을 버린다. 즉 부동지를 밝혀,
이 몸에 부동명왕만큼 부동지를 체현(體現)한다면 더 이상 악마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이유로 부동명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동명왕이라 해도 사실은 일심(一心)이 움직이지 않음
을 가르친 것으로 몸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사물에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사물을 한 번 보고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부동(不動)’이다. 왜냐하면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여러 가지 분별심(分別心)이
가슴에서 끓어, 가슴 속에서 움직인다.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긴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열 사람이 한 번씩 칼질을 해도 그 하나 하나의 칼을 막아 흘리어
그 행위에 마음을 남기지 않고, 그 행위를 버린다면 열 사람 모두의 움직임에 응한 것이 된다.
열 사람에 열번 마음이 움직였다 해도 어떤 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계속적으로 응해도 움직임에 빠진 것이 없게 된다.

만약 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 한 사람의 태도(太刀)는 막을 수 있을 지 몰라도
두 번째 사람일 때에는 이쪽의 움직임이 비게 된다. 천수관음(天手觀音)에 천개의 손이 있음을 생각해보자,
활을 든 한 손에 마음을 빼앗기면 다른 999개의 손은 할 일이 없다. 한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하여
천개의 손이 소용이 있다. 관음보살이라 해도 어찌 하나의 몸에 천개의 손을 갖는가?
그것은 부동지(不動智)를 얻게 되면 손이 천개라도 모두 쓸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에 핀 붉은 잎 하나만을 본다면 나머지 잎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하나의 잎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무심하게 한 그루의 나무를 본다면 수많은 잎이 남김없이
눈에 들어 온다. 한 장의 나뭇잎에 마음을 빼앗기면 나머지 잎은 보이지 않고,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백개 천개의 나뭇잎이 모두 보인다. 이것을 깨친 사람은 바로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이 된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단순하게 몸 하나에 손이 천개, 눈이 천개 있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믿는다.
조금 아는 사람은 몸 하나에 천개의 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거짓말이라 하고 비난하고 공격한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오직 감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공격도 안하며, 도리로 이것을 존경하여 믿고
불법이 하나의 사물로 근본적인 이치를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한다.

대개 다른 여러 가지 가르침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신도(神道)는 그렇다고 본다.
외관만을 보고 믿는 사람도 문제지만 무작정 공격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천안(天眼)에는 도리가 있다. 이것 저것 여러 가지 도(道)가 있지만 결국 낙착되는 곳은 같다.
초심자의 단계로부터 수행하여 부동지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면 다시 한번 초심이 머무는 단계로
돌아가야 하는 도리(道理)가 있다.

당신의 병법으로 말한다면 초심일 때는 태도(太刀)를 어떻게 잡는지조차 몰라, 몸에 마음이 머물 여유가 없다.
상대가 공격해 오면 생각할 여유없이 방어하기에 바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를 배우면 태도(太刀) 잡는 법, 마음 두는 곳, 이 여러 가지에 마음을 빼앗겨
상대를 칠 때에도 이것 저것 의외로 부자유스럽게 된다. 이것이 날이 지나 해가 바뀌도록 연습을 쌓으면
몸의 자세, 태도(太刀) 잡기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 아무 것도 모르던 초심 때의 마음이 된다.

이것은 처음과 끝의 마음가짐이 똑같이 된 것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다시 되돌아 세면
하나와 열이 옆에서 합쳐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음악의 12률(律)로 비유하면,
처음의 낮은 일월(壹越)부터 점점 올라가 상무(上無)의 최고음에 이르면 다시 되돌아
처음의 음과 끝의 음이 옆에서 만나는 것과 같다.

1. 일월(壹越), 2. 단금(斷金), 3. 평조(平調), 4. 승절(勝絶), 5. 하무(下無), 6. 쌍조( 調), 7. 부종(鳧鐘),
8. 황종(黃鐘), 9. 만(蠻), 10. 반섭(盤涉), 11. 신선(神仙), 12. 상무(上無).

제일 높은 것과 제일 낮은 것은 비슷한 것이다. 불법에서도 지극한 경지에 가면 불(佛)도 법(法)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에 띄는 장식도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초심자의 마음을 빼앗기는 단계인
'무명번뇌'와 뒤의 '부동지'가 하나가 되어 얕은 지혜가 활동할 여지가 없게 되고, 무심무념의 곳에 이르게 된다.

궁극의 곳에 이르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경지가 된다.
'가미꾸라'의 불국국사(佛國國師)의 노래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마음이 있건 없건 소야산의 허수아비 장난이 아니라네’

모든 것이 이 노래와 같다. 산전(山田)의 허수아비는 밭의 작물을 지키려고 생각도 안하지만,
활을 든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면 새나 짐승들이 그것을 보고 도망을 간다.
인형에 마음은 없지만 새나 짐승이 겁을 내고 달아나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떠한 도(道)이든 그 궁극에 달한 사람의 행동을 비유한 것이다. 신체의 어디를 움직이든
마음이 머물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건 상관없는 무념무심, 허수아비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도리에 어두운 사람은 전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나올리도 없지만 매우 높은 궁극의 지혜는
이미 깊은 곳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겨우 반쯤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혜가 머리를 내밀기 때문에 우스운 것이다. 지금 출가한 사람의 행동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理)의 수행, 사(事)의 수행

이(理)의 수행, 사(事)의 수행이란 것이 있다. 이(理)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탐구하여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 않고
무심(無心)하게 되는 도(道)이다. 그러한 사(事)의 수행을 하지 않아서는 도리만 가슴 속에 있어
손도 몸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事의 수행이란 당신의 병법에 보이는 자세를 말한다.
다섯 가지 자세를 절대의 하나에 귀일시키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다. 도리를 알아도 그것이 실제로
자유롭게 작용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몸을 다루거나 태도(太刀)쓰기가 훌륭해도 이(理)의 탐구에 어두우면 안된다.
理의 수행과 事의 수행의 두 가지는 마차의 두 바퀴처럼 되어야 한다.



머리카락 들어갈 틈이 없다.

머리카락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이 있다. 당신의 병법에 비유하여 말하겠다.
틈이란 사물이 둘로 겹쳐 있는 그 사이인데, 여기에 한 올의 머리카락도 들어갈 사이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두손으로 마주치면 “탁”하는 소리가 들린다. 때리는 손과 탁하는 소리 사이에
한 올의 머리카락도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손을 친 뒤에 소리가 생각하고 나는 것이 아니다. 치는 것과 동시에 소리가 난다.
상대의 공격해 오는 태도(太刀)에 마음을 빼앗기면 틈이 생겨, 그 틈으로 이쪽의 틈새가 비게 된다.
상대가 쳐오는 태도(太刀)와 이쪽의 움직임 사이에 머리카락이 들어갈 틈이 없다면
상대의 태도(太刀)는 나의 태도(太刀)가 되어 베어 버릴 수가 있게 된다.

선의 문답에서는 이 마음이 중요하다. 불법에서는 마음을 사물에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멈추는 마음을 번뇌(煩惱)라 한다. 급류에 구슬을 놓으면 굴러가듯 조금도 멈춤이 없는 마음을 중시한다.
석화(石火)의 기(機) ‘석화(石火)의 기(機)’란 것이 있다. “머리카락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돌을 탁하고 치면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는데, 친 순간에 나오는 불꽃이라 틈도 새도 없다.
이것도 마음을 멈출 틈이 없음을 말한다. 단순하게 빠른 것이 중요하다. 잠깐이라도 마음을 멈추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이다. 마음이 멈추면 내 마음을 사람에게 빼앗긴다 빨리 해야지 하고 마음 먹으면
그 생각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것이 된다.

서행(西行)의 노래에 ‘세상을 등진 사람이라고 하지만, 원래 이 세상은 빌린 숙사, 세상을 등진 만큼
마음을 멈추면 안되지’라 한 것은 강구(江口)의 유녀(遊女)가 부른 노래라 한다.
이 노래를 내 것인냥 마음먹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마음을 멈추면 안되지’란 구절은 병법의 요소라고 생각된다. 깨닫는 것이 있으면 한다.
선종에서 ‘부처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주먹을 쳐들어 답한 선사가 있으며,
‘불법의 극의는?’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송이 매화’라든지, ‘뜰앞의 동백나무’라고 한다.

멈추지 않는 마음은 색이나 향기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본체를
신(神)이라 받들고, 부처라 존중하며, 선심(禪心)이니 극의(極意)니 하고 부르지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금언 명구래도 분별에 머문 번뇌일 뿐이다. 석화의 번쩍 빛나는 번개와 빠름 이다.

예를 들면, “우에몽”하고 부르면 “예”하고 바로 번개같이 대답하는 것이 부동지이다. 우에몽하고 부르자
무슨 일일까 생각하고 분별하여 “무슨 일입니까”하고 대답하는 것은 번뇌에 머문 것이 된다.
멈추어 사물에 영향을 받아 헤메는 마음을 번뇌에 빠진 범부(凡夫)라 한다.

“우에몽”하고 부르자 “옛”하고 대답하는 것은 제불(諸佛)의 지혜이다. 거기에는 부처와 중생의 둘도 없고
신과 사람의 둘도 없다. 이같은 마음이야말로 신이라 하고 부처 라 한다.
신도(神道), 가도(歌都), 유도(儒道) 등 도(道)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약한다면
이 일심(一心)을 밝히는 것일 뿐이다.

말로 마음을 설명하자면, 이 마음은 누구에게도 있으며, 낮이나 밤, 착한 일, 악한 일, 업(業)에 따라 움직인다.
나쁘게 움직이면 집을 버리거나 나라를 망치는 것처럼 사람에 따라 착하게 되기도 하고 나쁘게 되기도 한다.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니 도대체 이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분명하게 밝힌 사람이 없다.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에 미혹되어 있다. 세상에는 마음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분명하게 밝힌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하고, 또 밝게 아는 이도 있지만 이것을 내 몸에 행하기는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심을 잘 설명한다고 해서 마음을 확실히 궁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에 관해 설명해도 입은 젖지 않으며, 아무리 불을 설명해도 입은 뜨거워지지 않는다.
물 그 자체, 불 그 자체에 접하지 않고는 알지 못한다. 물이나 불의 글자를 설명해서는 알 수 없다.
음식에 관해 설명을 잘 해도 배고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설명하는 사람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간에서는 불법도 유도가 심(心)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렇게 설명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가짐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으며, 마음을 다 궁구하지 못하고 있다. 각각의 몸에 있는 일심을 정말로 궁구하지
않고서는 확실하지 않다. 또 불법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밝지 못한 것은 배우는 사람은 많으나,
이것은 숫자상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모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심을 어떻게 밝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공부함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음을 두는 곳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까? 적의 몸이 움직임에 마음을 둔다면 그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긴다.
적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둔다면 그 태도(太刀)에 마음을 빼앗긴다. 적을 베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당하지 않는 곳에 둔다면 그 당하지 않겠다고 하는 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상대의 자세에 마음을 둔다면
그 자세에 마음을 빼앗긴다. 간단하게 말해 마음을 둘 곳은 없다.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을 여기 저기 다른 곳에 보내면 마음을 빼앗겨 상대에게 진다.
내 마음을 배꼽 아래에 밀어넣고 다른 곳에 보내지 말며, 상대가 나오는 것에 대응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듯하다. 그러나 불법의 높은 경지에서 보면 배꼽 아래에 넣어 다른 곳에 보내지 않는 것은
낮은 단계로 높은 경지는 아니다. 수행하고 연습하는 단계인 경자(敬字)의 심경(心境)이다. 또는 맹자의
‘방심을 찾는(求放心)’의 경위(境位)이다. 더욱 높은 경지를 향하는 단계가 아니다.
경(敬)이란 글자의 마음가짐이다. 방심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기로 하니 참고하라.

배꼽 아래에 밀어넣어 다른 곳에 보내지 않으려 한다면, 보내지 않아야지 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앞으로의 움직임이 나빠지고 대단히 부자유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마음을 배꼽 아래에 밀어넣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부자유하여 쓸모가 없다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좋은가’ 내가 대답하였다.
‘오른손에 두면 오른손에 마음을 빼앗겨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눈에 둔다면 눈에 빼앗겨 움직임이
잘 못된다. 오른발에 둔다면 오른발에 빼앗겨 자유가 듣지 않는다. 어딘가에 한 곳에 마음을 두면
다른 쪽에는 마음이 없게 된다’

‘그러면 어디에 마음을 두면 좋겠는가’ 어디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나의 몸 전체에
퍼져 있게 됨으로 손이 필요하게 되면 손을, 발이 필요하게 되면 발을, 눈이 필요할 때에는 눈을 쓸 수가 있게 된다.
마음이 필요한 곳에 가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건 필요에 응하여 자유롭게 일할 수가 있다. 만에 하나라도
한 곳에 마음을 정해 두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완전한 움직임이 안된다.
둘 곳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니, 생각도 분별도 남기지 말고 온몸에 마음을 던져 버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말고 때와 장소에 따라 맞는 쓰임에 맞추거라.

마음을 한 곳에 두는 것을 편락(偏落)이라 한다. 편(偏)은 한쪽에 치우친 것이다. 반대는 정(正)인데
모든 곳에 골고루 퍼진 것이다. 정심(正心)이란 마음을 전신에 퍼지게 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한 것이다.
마음이 한 곳에 치우쳐 다른 쪽이 모자라게 되는 것을 편심(偏心)이라 한다. 치우친 마음은 좋은 마음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한 곳에 굳어진 것을 편락이라 하여 도를 닦는 데에 가장 기피하는 것이다.

어디에 둘까 하는 생각이 없다면 마음은 전신에 주욱 주욱 펴져 나간다. 마음을 어디에 멈추지 말고
적의 움직임에 응해 그때 그때에 마음을 써야 한다. 전신에 퍼져 있다면 손이 필요할 때는 손에 있는
마음을 쓰면 되고, 발이 필요할 때에는 발에 있는 마음을 쓰면 된다. 한 곳을 정해 두면 그 둔 곳으로부터
꺼내 써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움직임이 둔해진다.

마음을 줄로 묶은 고양이처럼 어디에도 보내지 않으려고 내 몸에 잡아 맨다면
나의 몸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몸 안에 버려 두면 다른 곳에 보낸 것이 아니니
오로지 마음을 한 곳에 멈추게 하지 않는 공부야말로 수행이다.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안목이요 요점이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면
마음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다.
마음을 밖으로 움직일 때에도 마음을 한편에 두면 다른 아홉 방향은 마음이 모자라게 된다.
마음을 한 방행에 두지 않으면 열 방향에 마음이 가게 된다.




- 탁암(託庵) 선사

 

출처 : http://soohyun.compuz.com/zboard/view.php?id=taijiboard1&no=3979

 

 

출처 : 求道歷程(구도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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